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카페 창가 자리에 마주 앉은 순간,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온갖 시뮬레이션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. 화면 속에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도트 캐릭터가 아닌, 따뜻한 온기를 가진 진짜 사람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.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았지만 처음 몇 분 동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정적이 흘렀다. 모니터 뒤에 숨어 키보드로 대화를 나눈 내용만 합쳐도 책 한 권은 나올 텐데, 현실의 눈빛 앞에서는 고작 음료 빨대만 만지작거리는 찌질한 복학생에 불과했다.
침묵을 먼저 깬 건 연이였다. 연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일랜시아에서 우리가 함께 했던 황당한 실수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. 몬스터에를 같이 잡고 놀던 일. 매크로 유저들 사이에 끼어 장난치던 기억들. 신기하게도 게임 속 에피소드가 현실의 언어로 치환되자마자, 얼어붙었던 공기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. 목소리로 듣는 연이의 이야기는 텍스트로 읽을 때보다 훨씬 생동감 있었고, 우리는 금세 몇 년은 만난 사이처럼 편하게 웃고 떠들었다.
카페를 나와 신촌 거리를 함께 걸을 때, 문득 기묘한 현실감이 몰려왔다.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구석 컴퓨터 의자에 앉아 퀴퀴한 모니터만 바라보던 내가, 지금 이 활기찬 거리에서 마음에 두던 사람과 나란히 발을 맞춰 걷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. 길가에서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고작 망해가는 옛날 도트 게임에서 만난 사이라는 걸 상상조차 못 할 터였다. 그 기묘한 비밀스러움이 오히려 우리 관계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.
어스름한 저녁이 되고, 연이를 지하철역 입구까지 배웅해 주었다. 헤어지기 아쉬운 감정이 서로의 눈빛에 고스란히 묻어났다. 계단을 내려가려던 연이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. 그리고는 수줍게 웃으며 다음에는 게임 속 말고 현실에서 진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. 그 말은 더 이상 로랜시아 광장이나 포프레스네 숲속이 아니어도, 우리가 현실에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이었다.
낡고 먼지 쌓인 옛날 게임 일랜시아는 우리에게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. 방황하던 두 청춘이 우연히 교차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준, 가장 찬란하고 기적 같은 통로였던 셈이다. 랜선 너머에서 시작된 서툰 감정은 그렇게 차가운 모니터를 깨고 나온 소중한 경험이라고 본다.
4편에 계속~~ 많이 응원해주세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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